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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만파로 퍼지는 윤정미의 색깔 논쟁: 블루 걸과 핑크 보이
이영준

 

우리 사회에서 모든 것들의 의미가 가지는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 민주화가 진행 되고 나서, 감각과 의미의 영역에서까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후다. 그 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에도 시비가 걸리더니, 급기야는 색깔에 대한 시비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물론 민주화가 안 된 80년대에도 정치적 이념을 둘러싼 색깔논쟁은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에까지 적용될 정도로 색깔논쟁이 퍼진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후로, 생리대의 조직 사이로 액체가 스며들듯이, 색깔논쟁이 사회의 자잘한 올들에까지 스며들어, 사람들은 남이 입은 옷 색깔, 버스에 칠한 색깔에 대해서까지도 시비를 걸게 되었다. 가수 조영남이 서울미술관에서 있었던 토론회에서 한국의 자동차들은 색이 검은 색 아니면 흰색 밖에 없어서 단조롭다고 불평하던 것이 1985년이었다. 그게 정치의 영역 밖에서 벌어진 색깔논쟁의 미약한 시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직후에 시내버스에 보라색을 칠했는데, 홍대 교수가 디자인했다는 그 색깔은 시민들의 욕을 엄청 처먹은 후에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대학교수도 시민들이 제기한 색깔논쟁 앞에 무기력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색깔이라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그게 왜 정치적인지는 말하기 귀찮으니까 센스 있는 분들은 스스로 알아서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 결과, 사진가 윤정미는 사진으로 색깔논쟁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우리 사회에서 색깔논쟁은 자칫 심장판막의 색깔이나 손톱의 색깔을 보고 그 사람의 이념 됨됨이까지 예단을 내리지 않을까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미시적인 차원에까지 확대되었다. 윤정미는 그것도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이분법을 이용하여 하고 있으니, 날카롭고도 묵직한 일본도로 사람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방울토마토를 자르듯이 매우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그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하여간 윤정미의 색깔논쟁은 그 구조는 매우 단순한데 함의는 참으로 착잡하다는데서 오랜 여운을 남긴다.

방법은 이렇다. 애들 방을 둘로 나눈다. 사내애들 방에는 파란색 계통의 물건들을 늘어놓고, 여자애들 방에는 핑크색 계통의 물건들을 늘어놓은 다음 애들을 주인공으로 방의 가운데 놓고 사진 찍는다. 애는 자신을 둘러싼 사물의 색깔이자 성별을 결정해주는 초자아의 색깔에 대해 마치 스스로가 책임이 있다는 듯이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데, 사진가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에게 그런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사실은 좀 지나친 일이다. 그건 마치 재규어 승용차를 타는 사람에게 당신 차 이름이 재규어니까 당신도 재규어고, 그러니 사슴 한 마리를 날로 잡아먹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기호의 횡포이다. 재규어와 자동차 이름은 단순히 환유적 관계인데 말이다. 

기호의 횡포를 부리면 어떻게 되나? 아이러니하게도, 기호의 본성이 드러난다. 입자가속기로 미립자에 엄청난 에너지를 걸어 속도를 주어서 충돌시키면 거기서 나오는 파편들의 궤적을 통해 물질의 근원을 캐볼 수 있듯이, 애들을 강제로 자기 색깔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기호의 횡포를 통해 윤정미는 애들이 속해 있는 무겁고 끈적한 색깔과 감각의 질서를 애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실 애들로서는 그런 것 알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런 질서는 미리 준비되어 있고, 설사 아무리 깨인 부모가 애들을 성적인 스테레오타입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 딸아이에게는 탱크와 칼을 사주고, 아들에게는 꽃과 머리삔을 사준다고 해도 아이들은 마치 구심력에 이끌린 어떤 존재처럼 사회의 초자아가 정해주는 스테레오타입의 색깔을 스스로 선택하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게 된다.

매우 분류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는 윤정미의 사진은 그러나 매우 픽션인데, 여자애-핑크, 남자애-블루라는 구분은 어떤 질서주기행위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것이 픽션인 이유는 이 세상의 감각의 질서가 그렇게 칼로 자른 듯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아이들이 쓰는 물건이 그렇게 성별에 따라 색깔이 나뉜다고 해도, 회색지대는 있을 것이다. 남북을 가르는 휴전선의 양쪽에 있는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도 완충지대가 있는데 말이다. 따라서 윤정미가 만들어낸 것은 가상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실 그녀의 사진에서 우리가 관찰해야 하는 것은 사물을 그렇게 분명하게 가르는 개념적 연출과, 그것들을 방안에 늘어놓고 아이를 가운데 놓고 찍은 사진적 연출력 사이에 있는 교차점이다. 그 교차점에서는 사물들이 가지는 색깔들의 시각적 질서와 사진의 질서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단단한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윤정미의 사진의 메시지일까? 그렇다면 그녀는 굳이 누구나 다 아는 뻔하고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번 더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진장비를 가지고 미국 까지 가서 아이가 가진 모든 물건들을 방에다 늘어놓고 힘들게 사진 찍은 미련한 사진가 밖에 더 안 된다. 그것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윤정미의 사진에서 사물의 빡빡한 질서와 분명한 이분법만 보고 만다면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 교차점은 단일한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장이 아니다. 핑크색 물건들은 다 같은 핑크색이 아니며, 블루색 물건들은 다 같은 블루가 아니다. 아이들이 가진 모든 사물들은 미세하게 다른 핑크색으로 되어 있다. 다만 ‘핑크'라는 단일하고 추상적인 범주로 묶으면 같아 보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범주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돼지는 다 뚱뚱해, 남극은 항상 추워, 하는 식으로 간단히 사물을 분류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윤정미의 사진도 우리의 그런 습관에 잘 야합하여, 우리가 가진 세계상을 인정해주고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 애들이 뛰어봐야 어디를 가겠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스테레오타입의 정원에서 뛰어놀 뿐이지, 하는 안도감을 주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안도감의 망점 사이로 미세하지만 무시무시한 차이들이 숨어 있으니, 이 세상에는 같은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같은 것은 추상적인 범주일 뿐이다. 그 범주를 채우고 있는 사물과 감각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세상은 끔찍할 정도로 질서에 저항하는 차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에밀리가 가진 핑크색의 플라스틱 숟가락들조차 같은 핑크색이 아니다. 다 같이 공업생산된 것들인데도 말이다. 그것들은 놓인 위치와 조명 받은 각도에 따라 다 달라 보인다.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가 “같은 시냇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듯이, 한 물건이 다른 장소에 같은 시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물건과 물건 사이에 생겨나는 매트릭스에는 크고 작은 차이들이 만들어낸 구멍들이 숭숭 나 있으며, 예림이의 신발은 핑크색 계통이긴 하지만 다 다른 색이다. 심지어 같은 신발의 왼쪽과 오른쪽도 색깔이 다른데 말이다. 핑크와 블루의 아이러니는 생각보다 깊다. 그러니 남자애들은 블루만 좋아해, 여자애들은 핑크만 좋아해, 라고 말하는 것은 멀리서 보고 한국 사람은 다 똑같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 같이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런 식의 상투화에 매우 익숙해 있다. 독일인들은 근면하고 영국인들은 신사고 프랑스인들은 문화예술을 사랑한다는 식의 상투화, 아랍사람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는, 반월도로 목 잘릴 상투화 말이다.

따라서, 아주 간단한 스테레오타입을 다시 확인시키려는 것이라면 작가는 그렇게 복잡한 작업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사람들에게 어떤 색을 좋아하냐고 물어보고, 그 결과를 성별, 직업별, 학력별, 주거지별로 다양한 범주에 따라 통계를 내서 발표하면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윤정미의 작업이 말하는 것은 색깔에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 아닐까? 색깔논쟁을 음식에 확대해 보자. 그러면 색깔이 가지는 의미라는 것이 지극히 자의적이어서, 어떤 음식이 특정한 색깔을 띠고 있다고 해서 그 음식의 맛이나 의미가 그렇게 고정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빨간 고추가 매운가? 파란 고추가 매운가? 우리의 스테레오타입대로라면 빨간 고추가 매워야 한다. 자고로 멕시코의 할라페뇨에서부터 인디아의 칠리, 청양 고추에 이르기까지, 매운 고추는 색깔이 연한 녹색을 띠고 있는 것들이다. 코카콜라와 짜장면을 보자. 콜라는 시커먼 색인데 이는 결코 시원한 색은 아니다. 더군다나 코카콜라의 로고는 빨간 색인데, 이것도 시원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카콜라가 뜨겁고 무거운 색깔로 되어 있어서 더운 여름에 코카콜라만 생각하면 땀이 줄줄 흐른다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짜장면은 어떠한가? 이것도 역시 시커먼 색이다. 시커멓게 찐득찐득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이 짜장면의 표상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것 때문에 짜장면을 멀리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짜장면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색깔은 절대적인 기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색깔은 다양한 기호화의 작용에 몸을 맡기고 있는 죄 없는 기표인 것이다. 그 불쌍한 색깔을 끌어다가 이리저리 고약한 함의들을 씌우는 것은 인간들이다. 색깔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게 내가 주장하는 단순한 사실이다.

윤정미의 색깔논쟁은 차갑게 불붙는다. 누가 남자아이들에게 블루를 주고 누가 여자아이들에게 핑크를 주었는가? 부모인가? 사회인가? 학교인가? 이웃인가? 친구인가? 성의 구분이라는 애매하면서도 강력한 관습이자 초자아인가? 먼 미래에 이 아이들의 방에 또 어린아이로 태어날 그 아이들에게도 같은 색깔이 주어질까? 지금 자기 방에 핑크와 블루 물건들을 늘어놓고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아이들은 그 아이들의 초자아 노릇을 할까, 아니면 자신을 부정하고 물건들을 마구 뒤섞어서 핑크도 아니고 블루도 아닌 색깔의 회색지대에 놓이게 될까? 그것보다도 더 원초적인 질문은, 색깔은 꼭 구분돼야 할까? 핑크면 어떻고 블루면 어떤가? 50여년의 지난한 투쟁 끝에 우리 사회가 이제 간신히, 아주 작은 끄트머리만을 남겨 놓은 채 붉은 색 콤플렉스에서 거의 벗어났는데, 이제는 핑크와 블루를 특정한 성에 묶어주는 더 정교하고 교묘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윤정미의 색깔논쟁은, 겉으로는 핑크와 블루의 영역이 분명히 나눠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 내게는 왠지 색깔을 구분하는 짓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좀 더 래디칼한 질문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록---------------------------------------------------------------------------------------- 

<핑크 플로이드와 블루 노트>

   어릴 적 처음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핑크가 주는 어감 때문에 뭔가 부드럽고 말랑한 음악을 하는 분들인 줄 알았다. 그들의 가사에 이 세상의 온갖 상처와 고통에 대한 처절한 토로가 들어 있음을 알고 핑크색이 그렇게 달라 보일 수 없었다. 사실 핑크란 전염성이 강한 기호여서, 그 말만 갖다 붙이면 뭐든지 코먹은 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핑크 플로이드는 핑크색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룹이었으니, 핑크라는 말은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멤버인 로저 워터스와 시드 배릿들이 숭배하던 블루스 연주자인 핑크 앤더슨에게서 따온 것일 뿐이다. 어떤 분들은 핑크 플로이드와 핑크 레이디를 헛갈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두 핑크들은 음악을 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헛갈릴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모순과 상처에 대해 너무나 처절하고 아름답게 노래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에 핑크색의 함의가 결코 스며들지 않았던 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그들의 음악이 그렇게 쉽게 싫증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클럽은 블루 노트다. 뉴욕에는 하나 밖에 없지만 일본에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 있을 정도로 일본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곳은 일본 관광객들의 메카라고 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많이 온다. 내가 블루 노트를 갔을 때는 블루의 맑고 차가운 기운보다는 일본관광객들의 핑키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후론 다시는 블루 노트를 가지 않았다. 블루의 힘에 의존하여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그들은 핑크 노트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더 정직한 일이 아닌가 싶다. 블루 노트, 싫증난다.

<블루 오션에 빠진 핑크 레이디>

   1980년대 초 한국에서 어쩌면 이효리와 서인영의 대선배격인 섹시 컨셉의 <섹시 뮤직>과 <키스 인 더 다크>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던 일본의 여자가수 듀오 핑크 레이디는 지금은 플라워쇼핑몰 이름으로, 드라마 제목으로, 칵테일 이름으로, 자위기구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아무리 검색해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존재가 잊혀진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통해 핑크라는 말에 ‘야하고 천하다'는 함의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희자매나 숙자매, 국보자매 등은 핑크 레이디의 핑키함을 따라가지는 못했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사준 350원짜리 빽판(불법 복사레코드판)으로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이라는 것이 이 정도로 얄팍하고 천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얄팍함과 천함이 20여년이 지나서 오늘날 한국의 가수들에게 격세유전이 되었다는 사실이 또 놀라웠다. 역사는 반복되고, 핑크색도 반복된다. 한번은 한복 저고리 색깔로, 또 한 번은 섹시 컨셉의 노래색깔로. 한번은 매화 색깔로, 또 한번은 립스틱 색깔로.

   이제 핑크는 더 이상 블루 오션이 아니다. 아주 한정된 취향의 영역이 아니면 핑크는 통하지 않는다. 핑크 레이디는 80년대에는 블루 오션에서 헤엄쳤지만 21세기에 와서는 블루 오션에 빠져서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핑크 팬더와 블루 임펄스>

    나는 한 번도 핑크 팬더를 본 적이 없다 . 다만 제목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만 해 봤을 뿐이다. 핑크 팬더는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총 8개의 시리즈로 제작된 인기 탐정물로, 명배우 피터 셀러스를 낳은 작품이다. 1963년작인 제 1편에서 핑크 팬더란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별칭이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이 보석을 훔치려는 팬텀이란 별명의 도둑의 이야기이며, 나중에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화하게 되는 핑크 팬더는 이 영화에서는 영화 시작과 말미에 나와서 이 영화의 웃긴 소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마스코트로 활약한다. 거품 목욕 장면을 찍을 때 거품을 많이 나게 하기 위해서 독한 화학약품을 쓰는 바람에 배우들이 피부에 부상을 입었다고 하며, 이 부분에서 잠수하는 쪽이었던 로버트 와그너는 4주일간 눈이 보이지 않는 심각한 지경이었다고 하는 이 영화는 오로지 제목 때문에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일본이 개발한 제트훈련기 T4를 가지고 유유히 비행하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시범 비행팀 블루 임펄스를 보면 우리는 언제나 국산 전투기로 시범 비행팀을 꾸려보나 하는 부러움이 들었다. 1960년 3월 4일 하마하츠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5기의 F-86F로 창설된 블루 임펄스는 1964년 동경올림픽 개막식과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개막식에서 특수비행을 선보였으며, 자국산 항공기인 T-2를 거쳐 현재는 총 8대의 T-4를 운용하고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아마도 미국 해군의 시범 비행팀인 블루 엔젤스를 본따지 않았을까 싶다. 아름답고 위험한 묘기를 펼치는 시범 비행팀에게 블루라는 색깔은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남들을 위해 곡예를 펼쳐야 하는 조종사들의 강파른 운명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것 같다. 핑크는 왠지 죽음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보이는 색깔이지 않은가. 이 글을 쓰는 순간 블루 앤젤스의 비행기 한 대가 시범 비행 도중 추락하여 조종사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블루, 멍들은 색깔이다. 

<아웃 오브 더 블루>

   영어에서 블루는 좋은 뜻보다는 나쁜 뜻이 더 많은 것 같다 . 한국에서 블루라고 하면 시원하고 깨끗한 이미지이지만 영어에서 블루란 기본적으로 우울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막막함을 뜻하기도 한다. Out of the blue를 번역하면 "뜬금없이" 정도가 될 것이다. 아니면 "자다가 떡 받아먹듯이"가 더 좋은 번역일 것 같다. 아마도 그 말은 새파란 창공에서 갑자기 뭔가 뚝 떨어질 때의 그 황당함 때문에 생겨 난 것 같다. 남자아이들은 블루를 좋아하고 여자아이들은 핑크를 좋아하는 그런 습관은 아마도 아웃 오브 더 블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