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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나’들 : 시선의 권력 ] 중에서 발췌
이영준

 

`수 많은 ‘나'들 : 시선의 권력`
참여 작가 : 권순평, 전미숙, 김재민, 장용근, 최재경, 윤정미, 임민수

인간이 질서나 법칙을 만들어 문화를 구성하기 전에, 세계는 완벽한 혼돈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문화라는 것이 만들어지자, 혼돈 속에 나뒹굴던 사물에 이름이 붙고 의미가 고저오디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으리라. 시선에 얽힌 여러 규범들은 이렇게,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물에 의미를 고정시킨 그때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인간을 일정하게 반응케 하기 위해 정교하게 구성된 것들입니다. 학교, 극장, 백화점, 옷차림새, 머리스타일, 인터넷, 한강의 고수부지, 공원 등등. 자본, 국가, 근대의 재현체계는 우리를 일정하게 반응케 하는 개인으로 조직하기 위해 가지각색의 시각환경들을 만들어 정교하게 배치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이미 보는 대상과 범위, 방법과 도구마저 일정한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습니다. 주체로 조직된 관찰자 뿐 아니라, 사진가라는 주체 또한 늘 일정한 방식으로 사진찍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술제도는, 예술적이라고 알려진 틀만을 사용하도록 사진가를 교육하여 사물에 예술적인 외피를 씌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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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가 있으니, 그것은 사진가로서의 ‘나'이다. 그것은 윤정미의 ‘나'이다. 그녀는 내곡동 사람들이나 인사동 가게를 표본같이 찍고 있지만 실은 자기자신을 찍고 있다. 그녀의 사진 속 인물들의 동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카메라 뒤에서 초점을 맞추느라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윤정미의 모습이 아주 자그마하게 비친다. 그 ‘나'는 사진가로서의 위상, 보는 사람, 보이게 만드는 사람, 본 것에 특성을 부여하고, 예술의 틈바구니에 비집어 넣느라고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자신의 내러티브와 감각을 구축하는, 마치 성실한 목수나 직공 같은 존재이다. 즉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내세우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 이렇게 땀 흘리고 있으니 한번 보아 달라고 부탁하는 그 ‘나'다. 매우 성실하고 겸손한 ‘나'다. 다른 모든 ‘나'들처럼, 당연히 ‘나'가 여기 있으니 알아봐 주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식의 밥맛없는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윤정미가 성실한 작가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실하다 아니다의 얘기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브라이슨이 얘기한 상상계의 확대에 대한 얘기다. 윤정미도 상상계에서 놀고 있음은 마찬가지인데, 카메라의 시선을 확 퍼트려서 상상계에서 자신을 끄집어내기 위한 구축행위로서 수집가처럼 가게들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마치 불가에서 삼천 배를 하다 보면 자신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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