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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미 ‘자연사 박물관’ 개인전 리뷰
이선영 (미술과 담론)

 

윤정미가 찍은 자연사박물관의 박제 사진들을 보니 갑자기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막 죽은 생물체로 실험하는 해부학이나 생리학 시간보다는, 오래 전에 죽어 빠삭한 느낌의 표본들을 다루던 분류학 시간이 더 엽기적이었다. 한여름에도 냉기가 싸하니 도는 표본실?지금의 자연사박물관에 해당?의 으스스한 분위기도 그랬고, 어떤 탈취제로도 없어질 것 같지 않는 퀴퀴한 냄새하며, 듣도 보도 못한 생물들의 긴 라틴어 학명을 수백 개씩 외우면서, 그러한 명명과 계보를 통달하고 앎으로서,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은 착각의 시간들. 윤정미의 ‘자연사 박물관'(전시 부제)에는 근대적 계몽주의와 더불어 발흥한 박물학적 강박관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한 문화가 사물들 상호간의 근접을 체험하는 방식과 질서를 설정하는 방식을 살펴보면서, 근대적 박물관의 탄생의 예를 든 바 있다. 그에 의하면 17세기의 생물들은 박물학에 의해 구성된 지식의 그물망을 통해 조명되었다. 박물학 표본실은 구조들로 이루어진 책이요, 특징들에 따라 분류되고, 분류된 생물들이 전개되는 공간이었다. 동일성과 차이는 전적으로 이 구조와의 관련 속에서 검토된다. 구조는 가시적인 것을 제한하고 여과함으로서, 가시적인 것을 언어로 바꾸어 쓰여질 수 있게 하였다. 지구의 표층을 뒤덮고 있는 존재들은 이 구조 덕택으로 기술적인 언어에 편입되었다. 여기에서 언어와 사물의 최초의 대변은 모든 불확실한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립된다. 어느덧 자연은 언어에 의해 창출된 그물망 내에서만 실재하게 된 것이다. 박물학으로 대변되는 이런 문화의 기본적 코드들은 근대인의 경험과 사고를 정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질적 담론의 질서가 자리잡으려 한 그 순간, 근대예술은 문화의 원초적인 규약에 의해 정립된 경험적 질서로부터 미소하게 일탈하는 차이를 향해 나아갔다. 윤정미의 사진에 찍힌 우리의 근대적 자연사 박물관 역시 배열과 지시라는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사 박물관은 허술한 점이 없지 않다. 이론적인 박물학 자체도 살아있는 대자연을 포획하지 못하는 마당에, 한정된 표본을 다루는 자연사박물관의 체계란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틈들을 포착하는데 있어, 우리나라 자연사 박물관만한 것도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사진에서 우리는 박물학적 체계나 박물관의 수집품의 빈약함, 특히 재현적 장치의 어설픔으로 인해 ‘기존의 담론의 공간을 혼란시키는, 새로운 배열의 지형'(푸코)을 감지할 수 있다. 그녀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이상하게 박제된 사자와 호랑이들은 거의 새로운 돌연변이 종처럼 보이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녀의 박제 사진은 박제와 사진적 과정 그 자체가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려준다.
본래 사진은 ‘이미 죽어버린 순간 memento mori 을 포착함으로서 이루어진다'(수잔 손탁) 는 점에서 그렇다. 비슷한 맥락에서 바르트도 사진은 찍힌 대상이 지금 거기 없으며, 또 한편으로 그것은 참으로 존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환각이며, ‘죽은 것의 살아있는 영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윤정미의 사진에 찍힌 것은 체계적이고자 하지만 확보된 샘플이 많지 않아 체계적일 수 없는 한 대학 박물관의 모습이지만, 그러한 근대적 기획?강요된 체계의 가혹함과 헐거움?에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게 된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박물관뿐 아니라 사진 역시, 자연을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수단이기 보다는, 호기심에 찬 수집가적 욕망에 더욱 부응할 수 있는 매체임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