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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의 전리품: 윤정미 사진전 `자연사 박물관`
우종철 ((주)웅진닷컴 포인스팀), 『디지털 이미지』( 2002년 2월, p.151)

 

윤정미 사진전 <자연사 박물관>/ 갤러리 보다 2001. 12. 19 ~ 12. 31



윤정미의 사진전 <자연사 박물관>은 몇 개의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예외를 두지 않는다면 담은 출입을 통제하는 문이 있을 터, 그 문을 넘어가는 길이 그리 녹녹치 않다.

우선 그녀의 사진은 대개의 시각적 형상이 일차적으로 제공하는 은유와 의미의 실마리를 가까이 두지 않고 있다. 사진이 사진 그 자체로서 말하고 공명하는 것을 그녀의 사진에서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언뜻 어느 공공 박물관의 브로쉬어용 사진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의 정교하고 깨끗한 이미지들, 적절한 노출과 디테일로 만들어진 사진의 정황은 오히려 보고 느끼기 보다 읽고 해독하기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것이 그녀가 의도한 전략인지 알 수는 없으나, 여전히 이러한 어법은 편하게 읽히는 문맥이 아니다. 소박한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세기의 막바지까지 풍미하고 있는 개념성의 문제를 여전히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어딘가 지루하고 또 불편한 일이다.

윤정미의 사진은 <동물원>에서 이제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전시장의 입구에는 두 개의 작품집이 놓여 있다. <동물원> 과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전시장 안에는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들의 모습을 주로 정방형으로 촬영한 사진들이 두 층에 나누어져 전시되어 있다. 한 층에는 생태환경을 재현한 디오라마가 주를 이룬다. 하필 왜 동물일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동물이 아니라, 생명체들을 가두고 관리하는 기관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공기관에 대한 물음이 우리가 첫 번째로 넘어야 할 울타리일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은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그들의 소장품을 과시하기 위해 설립된 것에 유래하고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자연사와 관련된 자료와 표본을 수집 전시하고,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생물 자원을 효과적으로 연구하고 관리하여 자원 보전의 첨병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국가적으로 지원해야 할 사업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자연사 박물관은 현대의 모든 전시 행정이 그러하듯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와의 긴밀한 관련을 맺을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문화공간이 기획자와 투자가, 그리고 비평가와 소비자의 첨예한 함수 관계에 의해 성립되듯, 윤정미의 사진이 소재로 삼고 있는 대학의 자연사 박물관 또한 대학 당국의 이익과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녀가 대학의 상징물을 앞에 두고 박물관의 외관을 촬영하거나, 이와 유사한 형태의 디오라마를 다시 2층 전시의 입구에 배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는 그녀가 이전에 주목했던 동물원과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공적 전시장이 가지는 권력 시스템과의 유사성의 문제이다. 분류하고 계층을 만들고 구분함으로써 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사회의 체제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구조의 조직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통제의 편리성 때문일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은 이러한 계급구조를 집약적으로 표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시 공간은 그녀의 사진에 의해 다시 사회를 은유하는 상징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생물의 박제, 즉 ‘죽은 자연'의 형태가 사진의 특성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는 점이다. 사진은 존재하고 유동하는 것을 고정시키고 사물화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진에 찍힌 모든 이미지는 실제가 아닌 이미 사라져 버린, 죽어버린 이미지이다. 사진 속에 존재하는 생명체와 인물은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영원할 듯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지만 그것은 유동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죽은 자연'일 뿐이다. 따라서 사진은 사물화의 도구이자 관을 짜는 도구이다.

박제의 고정은 이러한 사진에 의해 얻은 정보를 통해 가장 극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고정하여 사물화 한다. 서로 다른 전시장의 박제가 유사한 형태로 보인다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형의 집행자인 사진기로 이미 죽어버린 사체를 다시 촬영한다는 것, 주검의 모습을 결정한 사진기로 주검의 형태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진짜의 생명, 진짜의 현실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그러나 사진기가 혹은 인간이 무슨 권리가 있어 동물원에 생명을 가두고, 그들의 주검을 전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조금이라도 민망함을 가지게 된다면, 결국 자연사 박물관에 채집되어 있는 생명들은 서구 열강들의 미술관에 수집되어 있는 전리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로부터 획득한 노획물이며 결국은 강자의 이익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윤정미의 사진을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읽고 해독해야 한다고 가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자연사 박물관>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