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_artworks
menu_curriculumvitae
menu_texts
menu_contact
   
 
윤정미의 ‘동물원’에 관하여
박영택

 

이 흑백의 사진들이 담고 있는 동물원은 ‘동물-원'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들의 시선이 방황하게 만든다. 방황이란 어떤 결핍에서 우러나오는 심리적 반응이다. 왁자한 사람들, 축제 분위기, 동물들의 재롱이나 어슬렁거림으로 부산해야 할 동물원과는 무관한 이 텅 빈 동물원, 한 쪽 귀퉁이 그 어딘가에 안타깝게 드러난 동물들, 서늘한 칸막이와 유리, 난삽하고 어설프며 완강한 구조물들, 시멘트 바닥의 물기와 피, 타일과 쇠창살, 그를 통해 번지는 적막과 공허, 음산함과 나른한 공기가 가득 들어차 있는 사진 앞에서 야릇한 감정에 빠진다. 동물원이란 공간이 갑자기 찹찹한 초상으로 떠오른다. ‘동물'보다는 동물‘원'이란 공간에 대한 임상의학적인 시선이 감지된다. 또한 그 우리 안에 있는 동물들은 보고 즐기고 웃을 수 있는 친근성 대신에 다소 서글프고 왜소한 존재로 강하게 환기된다. 애꾸눈이 된 부엉이, 한쪽 상아가 빠진 코끼리, 벽에 자신의 입을 처박아대는 하마,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고릴라, 동물원의 장식용 동물그림(키치)과 함께 하거나 박제가 되어버린 동물들이 그것이다. 그 풍경은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동물원의 풍경, 동물들의 모습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자꾸 틈새가 생기고 조각이 난다. 하긴 모든 이미지란 우리에게 보는 법을 새롭게 알려주면서 기존의 시각과 인식에 구멍을 내고 틈새를 벌려준다. 다소 낯설고 기이한, 초현실적 분위기가 감도는 이 동물원이 오싹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텅 빈 연극부대 같기도 하고 감옥이나 수용소, 병실 같다. 살아있는 동물들의 표본실인 이곳은 또한 핏물이 흥건하게 바닥을 채운 도살장, 인간의 동물 사육과 살해, 감금과 정복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곳은 아니던가? 윤정미는 결국 동물원이란 공간에 대한 입체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과연 동물원이란 무엇인가? 윤정미의 사진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런 것 같다. 그의 사진은 동물원에 대한 일종의 비평적 시선과 언급처럼 보인다. 인간은 왜 동물원을 만들었을까? 동물원의 기능과 그 공간 배치, 구조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현실과 권력, 그 공간의 배치, 분리와 통제, 차별과 배제, 감금과 훈육 등의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우리가 동물원에 가서 기대하는 모습은 어떤 장면일까? 그런데 이런 물음은 단지 동물원이란 특정한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우리들의 삶과 이 근대적 삶의 원천과 근간에 대해 상당히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가 하면 거기에는 매우 자기 반영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의 감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기도 한다. 인간과 동물은 무엇인가? 그 차이는 결정적인가? 우리들 인간 역시 이렇듯 특정한 우리 안에 갇혀 통제되고 훈육 받으며 한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바로 그런 인간형이 합리적이다라는 인간형 아닌가? 그것은 철저히 제도의 문제 아닌가? 제도와 권력의 관계망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있나? 그의 사진을 보다가 그만 너무 깊숙한 곳으로 몸이 말린다는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그런 조바심은 당혹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복잡한,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의식들을 고구마 줄기처럼 안기는 것 아닐까?

어린 시절 동물원이란 그 어느 곳보다도 신나고 즐거운 볼거리의 장소이다. 소풍, 어린이날이 동물원을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날이다. 그 축제에 우리들은 동물들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왜 축제와 동물원이 연관을 가질까? 하긴 인간은 동물을 수렵하거나 사육하면서 축제라는 의식, 행사를 치뤘다. 동물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동물의 시체를 놓고 춤을 추고 소리를 지로고 또는 그 동물을 보다 더 많이 잡을 수 있게 해다라는 기원의 표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름다울 미(美)란 한자는 커다란 양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라는 뜻이다. 양이 가장 중요한 식량자원인 유목인들의 삶과 풍습, 문화를 반영한다. 이후 인간은 동물과의 전쟁, 두려움과 길들임, 도움, 공생 등을 통해 인간의 삶을 가꾸어 왔다. 근대에 들어 인간의 기술과 과학의 발달은 이제 동물들을 완벽하게 포획하고 살생하고 장악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나아가 지식의 힘으로 그 모든 종들을 계통화, 체계화시키고 이를 인간의 지식 범주 속으로 수유하게 되었다. 그것이 일종의 도감이자 백과사전, 채집과 생물학 등이며 이를 실질적인 표본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동물원이다. 동물원은 근대의 소산이다. 그것은 미술관, 도서관, 식물원과 동일한 시기, 동일한 목적아래 생겨났다. 19세기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과 그에 따른 주말개념과 위락시설에 따라 생겨난 동물원은 인공의 자연이고 조작된, 가짜이자 모조의 자연이다. 인간의 부와 물질적 풍요의 진전에 따른 자연 지배 그리고 서구의 식민지 지배의 성취물과 그 피의 흔적 또한 그것에 새겨져 있다. 그곳에 박제가 되어 버린 동물들은 우리에 갇혀 인간의 눈요기가 되고 안스러운 생명을 연장해 간다. 동물의 본능과 원초적 자연에의 향수와 기억, 유전적 코드들이 완전히 증발된 이들은 하나의 표본과 도감으로, 종의 대표로 우리들 앞에 존재한다.

윤정미는 그간 특정한 구조물이나 공간에 관심을 갖고 이를 찍어왔다. 그런 관심이 자연스레 동물원이란 공간, 배치, 구조물로 연장된 것이다. 동물원의 공간구조나 인간 삶의 공간 구조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원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지고 또한 연작의 사진을 찍으면서 신의 단상들을 이렇게 늘어놓았다. 놀이 동산 옆 동물원 혹은 미술관 옆 동물원은 위락과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인간의 오락과 여가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장소이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 마냥 위장된 이 평화로운 장소는 그 이면에 권력과 지배, 정복과 볼거리의 역사를 은닉하고 있다. 우리에 갇힌 동물과 나의 거리는 너무 멀다. 이 편안함, 결코 동물의 야수성과 포악함이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거리감 위에 즐거움과 턱없는 우월감이 솟구친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던져주며 웃고 간혹 조그만 돌멩이도 던져본다. 인간이란 종이 그 어떤 동물보다 진화한 만물의 영장임을 실감나게 확인하는 장소다. 서구의 사유패턴,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것이 바로 그 인간의 우월감, 그럴 통한 자연의 지배와 점유에 있지 않았나?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그네들의 사상이 바로 근대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문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생계를 파괴하고 절멸시키며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죽음으로 내문 역사, 그 궤적이기도 하다. 동물원은 그같은 역사를 우울하게 비쳐준다. 그래서 윤정미의 사진 역시 우울한 동물원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이다. 이 한 장의 흑백사진 속에는 동물과 인간의 오랜 역사가 음화되어 있다. 그것은 결코 사진의 표면으로 드러날 수 없는 어둠의 역사인데 사진은 그 역사의 한 부분을 어떻게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