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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미의 시선
전용석, 『월간미술』(1999년 4월)

 

사진비평 - 전시 리뷰 / 보다 갤러리 1999. 4 14 ? 4. 20

나는 왜 동물원에 가는 걸까. 이 글을 준비하면서 새삼스럽게 하게 된 질문이다. 이 질문과 함께 내가 윤정미의 사진에 의해 형성되는 동물원 담론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윤정미가 동물원에 가듯이 동물원에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재롱떠는 원숭이를 보기 위해, 한가하게 거니는 다리 긴 새를 보기 위해 ?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유를 떨기 위해 동물원에 갔지, 동물원이라는 공간에 ? 그 공간이 재현하는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 간 적은 없었다.

이런 개입의 맥락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윤정미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일차적인 덕목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윤정미라는 동물과 다른 동물간에 발생한 육체적이고도 원초적인 만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그런 사진이 가능할까? 그런 만남으로 향해가는 사진은 가능할 것이다). 당연히 읽기의 다음 순서로 작가가 의지하고 있는 사진 외부(?)의 코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가 자신도 언급하고 있듯이 그런 개입은 미술관이나 도서관과 같은 표본의 수집과 정리 행위가 어떤 권력을 배후에 전제하고 있는가, 혹은 감옥과 같은 감시와 처벌의 사회장치가 어떻게 제도를 구조화/재구조화 하는가 등의 질문을 둘러싼 담화들에서 그 선례/전범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는 순간 그의 사진은 꽤나 단순하고 심심한 것이 되어 버린다. 즉, 윤정미와 동물의 만남 이전에 이미 만남의 방식이, 동물을 보는 시선이 정해져 있었고 ? 그것도 지적 유행에 발맞춘 흔적이 있는 ? 작가는 그 시선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 시선에 힘입어서 동물원을 하나의 시선을 재현하는 시설/제도로 볼 수 있었던 것이고 예의 시선에 대항하는 동물원 드러내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이는 윤정미의 사진과 동물원을 광고하는 입간판이미지를 나란히 대비시켜 본다면 극명하게 드러나는 점일 것이다. 애꾸눈 올빼미와 천진하게 장난치고 있는 원숭이 가족 사이의 거리. 윤정미의 파인더에 잡힌 을씨년스러운 동물원 건물 내부와 여가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외부사이의 거리. 그 거리감은 사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조명의 차이, 색채의 대비, 반사와 흡수의 이질성, 시선의 산란과 맞춤 등 ‘체계적으로' 산재하는 온갖 차이 때문인데 작가는 사진적 훈련을 거친 사람답게 체계적으로 그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진이 과연 이러한 대칭적 구조로 개운하게 설명되는가? 나로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 담론과 그의 사진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화 시키기 곤란한 갭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진이 흥미롭다. 거꾸로 위와 같은 드러내기가 특별히 비사진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고 과연 윤정미의 사진 없이는 그런 방식의 개입을 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각나기 때문에 더욱 그의 사진 ‘자체'에 관심을 돌려야 할 것 같다. 작가 스스로도 토탈로지tautology와의 씨름이 자신의 일관된 관심사였다고는 하지만 그 씨름에 대한 사진적 답이 ‘어찌어찌 해서 (여러 담화들 중에) 이쪽을 선택했어' 라는 식이 되면 곤란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전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윤정미의 사진에서 뽑아낼 수 있는 시선은 무엇인가. 그의 동물 사진들은 ‘사진적'이라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형식적 요소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프레임을 짜는 미장센의 감각이나 우연을 우연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체계적인 톤의 배치, 반사나 돌출적 대비 등을 억제하는 통제력 등이 그것으로 작가가 사진적 ‘표현에 골몰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그의 사진 앞에 서면 이 모든 것들이 앞에 이야기한 시선들 간의 대항/대립을 잊고 그의 사진'자체'로 관심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의 사진'자체'란 과연 무엇인가.

표현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진 ‘자체'에 대한 환기 ? 사진의 물질적 구조에 대한 환기는 자기 지시적인 것인데 그것은 대상을 프레임 상의 음영의 배치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환원시켜내는 것으로서 그렇게 사실적임으로 해서 대상과 자신의 거리를 좁히는 ? 대상은 사진 위의 톤으로 환원되고 주체는 톤의 배치를 결정하는 구조로 환원되는 것이라고. 이를 통해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입이나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비로소 하나의 표현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이것이 표현의 형식적 틀에 대한 자명한 명제임은 이해하겠으나 근본적으로 이런 논의는 ‘미학적'임으로 해서 동어반복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진적'이라는 개념이 도대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언어상식으로는 ‘사진적'이라는 개념은 다른 시각이미지에 비교해서 특별히 어떠하다라는 내용을 포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볼 때 사진적이라는 말은 이미지가 대상과 절대적으로 붙어 있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사진은 이미지 외부와 너무나도 ‘자명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그 최대의 특징이다. 이는 거꾸로 이미지와 관객간의 절대적 거리를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정말 사진적인 과제는 그 절대적 거리 ? 시선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선의 역사적/시간적 체계성 못지않게 시선의 육체적 비체계성을 담는 우연한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윤정미의 사진 가운데 박제 동물이 그럴듯한 그림을 배경으로 찍혀있는 작품들에 특별히 주목하게 된다. 이들을 박제?모사 사진이라고 불러보자. 그의 코끼리 사진들 앞에서는 ‘이건 내가 아는 코끼리가 아니군'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제?모사 사진의 경우 그런 진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진과 만나는 순간 ‘정치적'으로 설득 당하게 된다. 느닷없는 현실이 기억에서 튀어 오르는 것이다. 개입의 의도까지 초월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 ? 아주 짧은 동안 ? 그 사진의 음영 입자들이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경험된다. 체계적인 개입들이 (그 체계성 때문에) 지루하게 지속되다가 어떤 우연을 낳게 되는 경험을 낳고, 바로 그것 때문에 거꾸로 체계적인 개입들이 필연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사진의 음영은 아주 철저하게 표면이 되어 버리고 애매한 깊이를 남기지 않고 개운하게 현재하는 존재가 된다. 렌즈의 의미가 여기서 발생한다. ‘렌즈를 통해' 대상의 어떤 점을 포착하고 정착시켜서 발생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렌즈 자체의 존재'가 명백히 입증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

박제-모사 사진들이 위와 같이 사진적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진적 힘의 원천이자 동인을 해명하려는 것이지만 그들 사진의 힘은 정치적이고 사회적 의미들을 풍부하게 뽑아낼 수 있다는 점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그렇게 끝없이 지속될 이야기를 낳는 가능성. 그 사진들 때문에 비로소 동물에 세심한 관심이 가고, 동물들을 그렇게 다루는 인간성을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되고, 또 이런 투명함을 보여주는 작가의 조밀한 시선과 작가의 시선의 역사/습관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는 ‘대화지식/교감'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런 리얼리티는 마치 끝없이 샘솟는 오르가즘과 같은 것이다. 그 쾌감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람하고 라면 동물원이 재현하는 이데올로기와 ‘즐겁게' 싸울 수 있을 것 같다.”